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이테 만 해전 (문단 편집) ==== 전함파 장교들의 반발 ==== 허나, 일본 함대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였다. [[연합함대]]가 미 육군 수송선단을 직접 공격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구리타 중장의 2함대에 작전 내용을 전달하면서 벌어진 다음의 대화를 보자. ||코야나기 토미지 제2함대 참모장 "이 계획은, 적 주력의 격멸을 포기하고 적 수송선단을 작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이것은 전술의 상도에서 벗어난 기책입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적 주력 격멸을 제 1목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미 시게노리 연합함대 참모 "적 주력의 격멸에는, 기동부대의 항공병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이판 공방전에서 대타격을 받은 기동부대와 항공대의 재건에는 적어도 반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그런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동시에 적이 다음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이 필리핀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거기서 필리핀의 기지항공병력과 호응해, 제1유격부대의 전력으로 적 상륙선단을 격멸해 주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 작전의 주안입니다. 코야나기 "좋습니다. 적의 만내에 돌입하면서까지 수송선단을 격멸하라면 그것도 하지요. 연합함대 사령부는 이 돌입작전으로 수상부대가 괴멸되어도 상관없다는 결심입니까?" 카미 "'''필리핀을 빼앗기면 본토는 남방과 차단되어, 일본은 말라죽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함대를 가지고 있어도 보물을 썩히는 꼴입니다. 필리핀은 도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일전으로 연합함대가 괴멸되어도 필리핀을 확보할 수 있다면 후회는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함대도 없습니다. 돌입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장관의 결심입니다." 코야나기 "그렇습니까. 연합함대 장관이 그만큼의 결심이라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돌입작전은 간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적 함대는 전력을 기울여 이를 저지하려 할 겁니다. 따라서, 호불호를 묻기 이전에 적 주력과의 결전 없이 돌입작전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구리다 함대는 명령대로 수송선단을 목표로 적 항만에 돌진하지만 만에 하나 도중에 적 주력부대와 대립해, '''양자를 택일해야만 할 경우 수송선단을 버리고 적 주력의 격멸에 전념합니다.''' 지장 없겠습니까?" 카미 "지장 없습니다." 코야나기 "이건 중요한 요점입니다. 장관에게 잘 전해주십시오." 카미 "알겠습니다."[* 출전 :小柳冨次著「栗田艦隊 レイテ沖海戦秘録」pp51-52, 佐藤和正著「レイテ沖海戦~日米海軍最後の大激突」上巻pp93-94]|| 군령부와 연합함대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수송선단을 격멸해야 한다고 했으나, 정작 일선 부대에 전달할 때는 그 취지를 납득시키지 못했으며, [[거함거포주의]]와 [[함대결전사상]]에 찌든 전함전대 승조원들이 함대결전의 기회가 온다면 결전을 벌이겠노라고 고집부리는 것을 꺾지 못했다. 함대결전을 벌인 이후의 지침도 명확하게 주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구리다 턴은 예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또한 아래와 같이, 제독들 사이에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사회 토요다 씨는 19년 9월 케이오 대학 히요시 교사로 연합함대 사령부를 이동시켰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요코야마 지휘관 선두라는 건 항공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지켜져야 해. 최고 지휘관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진 싸움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가령 하와이도 그렇지. 야마모토 장관이 기동부대와 같이 가서 항공모함을 찾으라고 명령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선 봉쇄로 아무런 지휘도 할 수 없었지. 마츠다 적어도 장관은 제일선에 있어야만 해, 이건 원칙입니다. 레이테에서 진 다음에는 아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육상이라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는, 구리다(타케오)씨가 타고 있는 '야마토'라도 '무사시'라도 좋으니까 타고 있었으면 좋았잖아. 요코야마 타고 있었다면 레이테 만에 돌입할 수 있었다는 거지. (중략) 노모토 수뢰전대에서 힘차게 달리는 걸 보고, 믿을만한 놈이라고 중앙부는 생각했겠지. 그 때까지 큰 사고도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보냈으니까. 차라리 해상 경험이 풍부한 것치고는 머리도 좋았던 코무라 케이조(45기 소장)같은 사람을 5, 6년 정도 더 키웠으면 최적임이었을 텐데. 구리다 씨도, 그저 수뢰전대에서 달리기만 했을 뿐 머리는 없었어. 레이테 때는 내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어떤지는 모르지만, 여기 있는 분들 말을 들어보면 장관으로서 자주성이 없어. 오자와 씨와는 전혀 다른 점이야. 레이테 출격 때 브루나이에서 작전회의 때는 - 이야기를 들은 것 뿐이라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 다른 사령관에게서 레이테 만에 난입이라니 해군의 타락(*)이라고 한참 악담이 나왔는데, 그런 걸 휘어잡을 능력이 구리다 씨에게는 없었어. *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연합함대의 작전 목표는 미 육군 수송선단의 격파였지만, 수십년간 함대결전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연합함대의 전함전대 승조원에게는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역주) (중략) 마유즈미 해대를 나오지 않아도 중앙근무를 하면 자연스럽게 그런 것은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레이테의 반전에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그 때는 장관만이 아닌 참모장도, 우리 말단 함장도, 맥아더의 부대는 전부 상륙을 끝내 결국 가봤자 빈 배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곳에 2함대를 희생시키며 돌입해도 의미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사기도 높지 않았죠. 작전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쓰시마 해 해전에서는 네보가토프 제독이 주력함을 이끌고 항복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뭐 이런 얼간이가 다 있나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부하를 살려 해군 재건에 사용하려고 네보가토프는 생각한 것 아닐까 합니다. 구리다 장관은 우리 함장 클래스와는 달리 네보가토프 같은 심경이 조금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출전 : [[http://wgforum.kr/kancolle_war_museum/7453343|2차대전 중 일본해군 지휘관을 평가한다]]]|| 위의 글은 당시의 지휘부를 비판하는 일선 함장급들의 회상인데, 마츠다 치아키는 4항전 전대장으로 이세급 전함 2척을 지휘하며, 마유즈미 하루오는 중순양함 토네의 함장으로 레이테에 참전했다. 좋게 말하면 지휘부를 비판하는 것이지만, '''간단히 말해, 일선의 함장, 제독들이 수뇌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구 일본군의 연공 서열이 어땠는지를 알고 있다면 정말 놀라울 정도. 당시 일본 해군에서는 파벌이 갈려있었는데, 이러니 저러니 하지만 간단히 나누면 전함파 VS 항공파이다.[* 실제로는 전함파 내부에서 수뢰전(여기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나구모 주이치]])과 포격으로 파벌이 갈렸고, 조약파가 개전 이전에 대거 갈려나간걸 감안하더라도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야마모토 이소로쿠]]) 여전히 잔류한 조약파와 함대파 사이의 불화가 남아 있었있으므로, 대립의 구도가 그렇게 간단하진 않았다.] 그리고 이 파벌에 따라서 전술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랐다. 가령 기함이 앞장서야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전함파 내부에서도 수뢰전과 포술과의 의견조차 갈렸고, 기함은 어떤 배로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전함파와 항공파는 의견이 달랐다. 전함파는 그 외에도 전파 침묵과 야간전에 광적으로 집착했는데, 이 점 때문에 수리가오 해협 해전의 패전을 자초하게 된다. 그러나, [[이노우에 시게요시]]나 [[오자와 지사부로]] 등 일부 비주류를 제외하면 단지 수단이 전함이냐 항모이냐의 차이일 뿐 '''한방 승부의 함대결전에 모든 걸 건다'''라는 시각은 거의 동일했다.[*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http://www.nids.mod.go.jp/publication/senshi/201203.html|#]]] 게다가 파벌과는 무관하게 잘 지내는 이들도 꽤 있었다. 따라서 레이테 만의 전개는 단지 기존의 전함파 vs 항공파의 대립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일선 장교들이 보기에, 문제는 연합함대 사령부에 있었다. 일선에서 함대결전을 지휘하는 조직이었던 러일전쟁 도고 헤이하치로 시기와는 달리 2차대전기에는 연합함대 지휘부는 실전에 나가지 않았다. 전함을 호텔로만 써먹은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부를 지상으로 옮긴 코가 미네이치, [[게이오기주쿠대학]]으로 사령부를 이동시키며 '''본토로 도망친''' 도요타 소에무를 비롯한 연합함대 사령장관들의 추태에 이어 함대결전을 포기한 2함대 사령장관 구리다 타케오 같은 [[높으신 분들]]의 행태는, 실전에 나가는 것도 아니면서 작전을 담당하는 상급 총사령부 격인 군령부의 입지만 애매하게 만들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 [[태평양 함대]]처럼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해내지도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 반면, 지휘관의 미덕인 '''기함이 선두에 선다'''는 연합함대의 자랑스러운 전통[* 이것은 전함파에서도 수뢰전 파벌이나 소장파(상술한 마유즈미 하루오가 대표적)가 주장했고, [[높으신 분들]]은 '''자기네들의 호텔이 되어야 하는''' 주력함의 투입 자체를 [[함대결전사상]]과 [[점감요격작전]]을 핑계삼아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전함파만의 문제도 아니었고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동일했다.]은 일선의 중견 지휘관에게만 강요되었다.[* [[과달카날 해전]]의 아베 히로아키, [[타사파롱가 해전]] 등에서 활약했지만 상층부에 반대하고 기함을 선두에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임된 다나카 라이조, 레이테에서의 오자와 지사부로/니시무라 쇼지, 대미개전을 반대한 유능한 행정가였지만 전쟁 말기 독박을 뒤집어쓴 야마토 특공 당시 2함대 사령장관 이토 세이이치 등이 대표적인 희생자.] 오히려 지휘관이 어디 있어야 하는가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했다. 항공모함을 기함으로 삼았던 나구모나 오자와는 당연히 선두에 설 수는 없었지만 당연히 일본군에서도 이들에게 지휘관 선두를 들먹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진짜 문제는 보신주의에 젖은 [[높으신 분들]]이 아예 싸움을 피해버리는 바람에[* 御田俊一『帝国海軍はなぜ敗れたか』] '''최고사령부의 의도가 현장에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진주만 공습]]은 대표적 항공파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에 의해 주도되었음에도 함대결전급 전력(정규항모 6척, 고속전함 2척)을 동원한 대규모 작전에 정작 본인이 참가하지 않는 바람에 전함보다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항공모함과 항만 시설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미드웨이 해전]] 역시 함대결전급 전력이 동원된 전투임에도 작전목표는 명확하지 못했고 수뇌부는 주력(항공파 입장에서)인 정규항모 4척의 상실을 초래했으며, [[과달카날 전역]]에서는 [[높으신 분들]]이 몸을 사리며 주력함의 투입을 미루는 사이 고속전함 2척과 정예 항공승무원들을 대거 상실하면서도 전과를 얻지 못했고, 대전 말기 레이테 만 해전에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들은 본토로 도망치면서 잔존 함대에는 황국의 흥폐가 여기에 달렸다고 훈시하면서 미 육군 수송선단과 [[동귀어진]]하라는 명령을 내린 도요타 소에무는 전함파였다. 표리부동 그 자체였던 것. 상층부가 일선 장병들에게 권위와 신뢰를 상실하기까지 이르기에는 이런 경위가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